조선 시대에는 국마(國馬)를 기르던 목장이었고, 전란의 시기에는 왜군의 군사기지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동해안 최대의 어업 전진기지였던 곳.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동구에 있는 어항 ‘방어진’이다. 울산에서 가장 먼저 전등이 켜지고, 목욕탕과 극장이 들어설 만큼 번성했던 항구. 그 시절의 화려함과 애환을 고스란히 품에 안은, 변화무쌍했던 방어진의 어제와 오늘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산책의 첫 시작은 방어진항 북쪽, 중진1길에서 시작한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당시 가장 번화했던 골목으로, 1920년대 풍부한 수산 자원을 찾아 일본 서부 지역 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오며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현재도 약 10채의 일본식 가옥(적산가옥)이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 있다.
바다 쪽으로 내려와 항구의 중심부인 방어진 공동어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방어진의 어제와 오늘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비릿한 바다 내음과 활기찬 어업의 현장, 그 사이 꽃 피운 지역 예술 공간은 방어진이 단순한 어항을 넘어 문화의 항구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항구를 벗어나면 길은 남방파제 쪽으로 이어진다. 방파제 인근은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구간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는 동해 수평선까지 시원하게 펼쳐진다. 남방파제를 지나면 슬도 해안 산책로로 이어진다.
슬도는 방어진항과 맞닿은 작은 섬으로, 섬 전체가 구멍 뚫린 곰보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파도가 이 구멍을 드나들며 내는 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하여 슬도라 불린다. 그 이름의 뜻처럼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기에 더할 나위 없는 명소다. 여기서 산책을 마무리해도 좋지만, 여유가 있다면 대왕암공원 둘레길까지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방어진의 역사는 빛바랜 추억이 아니다. 어시장의 활기와 예술의 향기가 어우러져, 다시금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을 예술로 빚어내는 방어진을 걸으며, 우리가 함께 채워갈 내일의 풍경을 찬찬히 상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