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온 생활필수품 옹기. ‘독 안에 든 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 등 다양한 속담의 소재로 쓰일 만큼 우리의 생활은 옹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흙냄새와 삶의 궤적. 한 나라의 역사를 품은 옹기는, 세월이 갈수록 그 가치가 깊어진다.
옹기를 논하자면 울산을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옹기 역사의 산실, 외고산 옹기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옹기 생산량의 50% 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이곳. 그리고 그 배경에는 흙과 불의 인생을 살아온 장인들의 이야기가 있다. 전통을 계승하는 삶. 울산 무형문화재 제4호 신일성 옹기장을 만나 그 뜨거운 세월을 잠시 엿본다.
국내 최대규모의 집단 옹기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골목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이곳. 외고산 옹기마을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말, 영덕 출신의 장인들이 언덕 밭에서 옹기작업을 시작하며 형성됐다. 60년대 이후로는 천혜의 옹기장소로 알려지며 전국각지에서 350명의 옹기 장인과 도공들이 마을을 찾아왔다.
장인들의 굵고 갈라진 손마디에서 탄생한 옹기들은 대한민국을 넘어 미국, 일본 등 외국에까지 생산 수출되었고, 80년대에는 책자로 소개되며 외국 도예가들이 찾아오는 등 울산의 자랑스러운 문화로 번성하였다. 옹기와 가마를 만들 흙이 좋고, 기후 등의 주변 환경이 적합한 이유도 있었지만, 기술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장인들의 노고가 컸다.
마을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아기자기 꾸며놓은 조형물들과 체험학습용 장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업화 이후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전체적으로 낮아진 것이 현재의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옹기 마을의 가마는 꺼지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고자 전통기술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7명의 장인이 있다.
울산 무형문화재 4호 신일성 옹기장은 외고산옹기협회 회장으로서, 울산옹기축제를 이끌어 간 주역이다. 울산 옹기축제는 국내 유일의 ‘옹기' 축제로, 옹기 마을을 주민참여형 마을로 활성화하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꽃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 제23회 울산옹기축제 준비에 한창일 때, 신일성 옹기장을 만나 대화를 이어나갔다.
“ 옹기는 아름다운 문화이자 소외계층을 살리는 문화입니다.
옹기의 정신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Q(질문)옹기제작을 처음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A(답변)집안 대대로 경북 영덕에서 옹기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저희 친할아버지가 옹기장이셨고 집안 가족들이 옹기장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옹기를 배울 환경이 만들어졌어요. 옹기를 팔아서 물물 교환할 정도로 옹기를 귀하게 여기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웠고 다행히 손재주가 있어 20대에는 손에 작업이 익었습니다. 옹기를 만드는 건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끈기와 손재주가 있어야 합니다. 10명 정도 도전하면 2~3명만이 옹기장이 될 수 있을 정도지요. 가업을 이어간다는 게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Q(질문)외고산 옹기마을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A(답변)당시에 경북 영덕은 숨 쉬는 옹기그릇을 제작하는 장인들이 있기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교통이 좋지 않아 타지에 옹기를 팔기에는 운송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비포장길이라 부산에 다녀와도 이틀 넘게 걸려 도착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부산의 역할이 커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부산 인근 지역에 옹기장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상수도가 없고 도랑 가에서 기름 냄새가 올라오던 시절이기에 옹기는 식품저장을 위해 꼭 필요한 물품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리하여 1963년도에 외고산 옹기 마을을 찾아와 정착하게 되었지요.
Q(질문)옹기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A(답변)배고픔을 면하려던 이들이 옹기촌을 찾아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옹기촌에 들어오면 옹기굴이 있어 따뜻했고 배고플 일이 없었으니까요. 박해를 당하던 천주교 신도들도 옹기촌에 찾아와 정착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아호(雅號)가 ‘옹기’이고 옹기장학회를 만들어 지원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소외된 계층을 살린 문화가 옹기 문화입니다. 마당에 놓인 장독대가 그 집의 얼굴이자 상징이었고 옹기그릇을 들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식사하던 시절이지요. 옹기 산업이 저물면서 옹기를 그만두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만, 그 시절을 지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사명감이 생긴 것 같습니다.
Q(질문)외고산 옹기마을에서는 어떠한 일을 하고 있나요.
A(답변)할아버지 때부터 배워온 숨 쉬는 그릇을 고수하여 브랜드로 만들려는 노력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도예촌에서 옹기제작 시범 및 옹기작품 제작 전시도 했고, 일본 도예인들을 만나 우리의 토기를 보여주며 문화교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인을 만나며 느낀 점은 우리의 옹기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대단한 문화라는 점입니다. 원심력을 가장 일찍 사용한 제작문화이며 다른 그릇에 넣으면 썩는 음식도 우리 옹기에 넣으면 숨이 살아 오래가지요. 문제는 전 세계 사람들도 인정하며 대우해주는 우리 문화의 가치와 정체성을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을을 안정화하기 위해 외고산 옹기회관을 건립했고, 우리 옹기 문화를 알리기 위해 옹기축제를 시작했습니다. 축제를 위해 세계에서 제일 큰 독을 만들기도 했고, 정관을 통과시키기도 했습니다. 6회쯤 되어서야 지역 문화로 정착되는 걸 보고 한편으로 안심했습니다. 대한민국 옹기가 왜 위대한가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Q(질문)마지막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A(답변)요즘은 여기 일성토기에서 아들과 며느리에게 옹기 기술을 전수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소원이 있다면 옹기에 대한 이론과 용어들이 하나로 정립되길 원합니다. 옹기 장인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다 보니 제대로 된 호칭이나 명사가 없어요. 일제시대에 정립된 일본 명사들이 그대로 표기되는 경우들도 있지요. 돈을 따지다 보면 잃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배워서 우리네 문화가 계속 유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인터뷰를 마친 신일성 옹기장의 얼굴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한 분야에 오랜 시간 몸담으며 최선을 다해온 장인. 그가 심은 싹들이 자라 현재의 옹기마을이 있다. 사그라지지 않는 그의 열정처럼 부디 외고산 옹기마을의 정체성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최근 옹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숨을 살려 제작된 옹기가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숨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부드러운 흙으로 빚어낸 외고산 옹기들. 꼭 한 번 옹기 마을을 찾아가 전통의 숨결을 들이마시며 일상 속 건강한 활력을 얻어 보기를 추천한다.